세월의 나래 속을 파고 들어가면, 흑백 TV의 뉴스시간에 종종 등장하였던 풍경으로, 솜사탕 든 아이의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어린시절 창경원의 이미지는 유희공간이며, 놀이공간이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못 다한 삶의 시간과 세자(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잔잔히 남아 있는 곳이며, 일제강점기에 근엄한 나라의 궁궐이 놀이공간인 창경원으로 바뀐 역사의 상흔을 간직한 곳이다.
창경궁의 정전은 궁궐 중에서 유일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창덕궁과 담장을 같이 하고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통명전 언덕에 위치한 함양문을 지나면, 창덕궁 후원으로 바로 연결이 된다.
▲ 창경궁 금천위의 옥천교
정문인 홍화문을 지나면 명당수가 흐르는 옥천교를 건너게 된다. 이 교각도 다른 궁궐들처럼, 홍예교로 연결되어 있고, 교각에는 법수 · 해태 등의 서수(瑞獸)나 교각 사이에 악귀를 물리치는 귀면(鬼面) 부조가 있다.
창경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궐내각사 건물이 적어서 자연스러움이 많이 묻어나온다. 소나무 숲 속에 살포시 가려진 배치된 전각들은 일반 궁궐에서 풍기는 권위적이고, 서열적인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창경궁에서 옛 전통정원을 감상 할 수 있는 곳은 통명전 지원과 낙선재 후원 그리고 춘당지 주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옛날 동선을 따라 궁궐 내를 산책한다면, 일반적인 노선인 명정전과 함인정을 거쳐, 통명전 방향으로 들어서서 춘당지가 나오는 숲 속 길로 가는 동선과 나인들이나 궁녀들이 쉽게 빠르게 오갈 수 있는 종묘에서 함인정 방향으로 들어가 통명전과 자경전 터가 있었던 언덕을 넘어 후원으로 돌아 나오는 동선이 있다. 정원의 색다른 면을 감상하고 싶다면, 후자가 더 운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정전인 명정전 좌측면에 펼쳐진 공간: 경춘전, 영춘헌, 통명전 일대
옥천교를 지나 바로 보이는 곳이 정전인 명정전이며, 그 뒤편에 바로 문정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주변일대가 경춘전, 통명전, 함인정 등의 정전이나 정자들이 자연스럽게 수목들 사이로 옹기종기 배치되어 있다.
사도세자는 통명전과 양화당이 있는 영춘헌의 서행각인 집복헌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들 정조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한 곳이 문정전이며, 정조가 승하한 곳은 영춘헌이다. 또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배경도 이 곳을 중심 무대로 펼쳐지고 있다.
▲ 경춘전 앞의 함인정
경춘전 앞 중심 공간에 우뚝 솟은 함인정은 사방이 확 트인 정자이다. 인수대비가 주로 여인들을 위해 연회를 베푼 곳이라고 전해진다. 함인정 내부에는 사방으로 도연명이 지은 춘하추동에 대한 시귀(詩句)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그 시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춘하추동의 경색을 읊은 것으로, “봄에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은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여름 의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많으며, 가을 달은 환하게 광채를 내며 밝기를 떨치는데, 겨울 산봉우리에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는 빼어나기가 그지없다.”라는 의미로 어진 임금의 태평성대를 표현한 함인(涵仁)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 같다.
창경궁의 후원은 현재 춘당지가 있는 북쪽이며, 낙선재지역은 주로 세자나 세자빈, 혹은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었기에 주변 경관요소들이 뛰어나고, 통명전 주위와 양화당 뒤 언덕 부분이 정원의 형태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꼽을 수 있다.
▲ 통명전 지당 일원
영춘전 맞은 편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장희빈과 인현황후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곳이기도 하다. 몇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순조 때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현재의 건물이 다시 축조되었다.
통명전 지당의 물은 지당 북쪽 4.6m 거리에서 지하수를 끌어 사용하는데, 입수는 둥근 샘에서 나오는 물이 직선의 돌로 만든 물도랑을 통해 지당 속에 폭포형태로 떨어지게 되고, 출수는 물이 차면 흘러넘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지당의 형태는 네모난 방지(方池)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약간의 아치형의 석교가 놓여져 있다. 네 벽을 장대석으로 쌓아 올리고, 석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를 조각한 기둥이 받치고 있다. 우리나라 궁궐의 교각이나 석주에는 군자를 상징하는 연잎 모양의 석주를 많이 사용하였다. 지당 속에는 석분에 심은 괴석3개와 기물을 받혔던 앙련 받침대석 1개가 있다.
통명전 지당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석난간을 두르고, 연못 속에 괴석을 배치한 것과 교각이 중간에 놓여 있고, 3개의 괴석은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 봉래, 영주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신선사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 궁궐 속에 축조된 채색되지 않은 낙선재
낙선재는 창경궁 문정전 뒤편 창덕궁과 이웃하고 있지만, 왕비의 생활공간인 통명전 뒤편 언덕 위로 올라가면, 창덕궁으로 통하는 함양문과 연결되어 창경궁에서 더 수월하게 찾을 수 있다.
헌종 13년(1847년)에 건립한 것으로, 주로 후궁들이 사용하였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축물이다. 사랑채인 낙선재와 안채인 석복헌, 별채인 수강제가 같이 있고, 후원에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당이 주변에 위치하여 궁궐의 화려함을 대신해 주고 있다. 육각형의 상량정은 원래 평원루라 불렸는데, 일제강점기에 상량정으로 바뀌었다.
▲ 낙선재 후원의 화계와 석조물
낙선재 후원은 경복궁의 아미산원과는 달리 정갈하면서도 단정하게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4-5단정도 단처리를 한 화계와 높이 1.5~2m 정도의 꽃담이 있어 뒷동산과 구분된다. 화계주변에는 괴석과 굴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괴석분에는 삼신산 중의 하나인 소영주(小瀛洲) 라는 글자를 새긴 괴석분이 점경물로 놓여 있다.
▲ 낙선재 만월문과 꽃담
낙선재 후원 만월문(滿月門)은 중국전통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문(洞門)의 형태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꽃담과 문양들은 전통한국의 미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 소담스러우면서도 은근한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낙선재는 또한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마지막 황실 여인들인 순종비 효황후,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이 외롭게 생활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 낙선재 외뜰에 위치한 정자
낙선재에서 약간 한적한 곳에 고요히 자리 잡은 이름 모를 한 채의 정자에서 조선의 기품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였다. 창호를 바른 분합문형식의 방이 있는 정자로 채색하지 않음으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 춘당지 일대
통명전을 지나서 수림이 우거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꽤 넓은 면적을 가진 큰 연못과 작은 연못으로 이루어진 춘당지를 만나게 되며, 큰 연못 속에는 둥근 섬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옛 춘당지의 위치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창덕궁 영화당 앞에 펼쳐진 춘당대 앞의 너른 터에 자리 했던 작은 연못 부분이었고, 현 춘당지의 위치는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논이 있었던 곳을 일제강점기에 이를 파헤쳐 큰 연못으로 조성하였으며, 그 후 1983년 자연석을 쌓아서 지금의 형태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연못 주변을 산책하면서 유유히 걷다보면, 한적한 등성이에서 팔각형의 칠층석탑 한 개를 발견하게 된다. 약간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 곳에서 다시 작은 연못을 지나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 축조되어 있다. 그 옛날 식물원과 동물원으로 조성되었던 창경원의 놀이공간인 곳이다. 지금 동물원은 없어졌지만, 시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세워진 식물원의 대온실은 이미 100년의 세월을 지나 근대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 보기 더물게 자연경관을 풍성하게 간직한 채 넓은 면적을 점유하고 있는 춘당지는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자주 찾아 드는 곳으로, 자연생태 환경이 잘 보존된 곳이기 도 하다.
가끔씩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도심 가까이에서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약간은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글: 김묘정 성균관대 조경학과 겸임교수 現 경기도 문화재 위원>
한경닷컴 키즈맘뉴스 손은경 기자(sek@kmo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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