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검사의 성추행 폭로로 거센 파장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그녀의 고백에 용기를 내듯 곳곳에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백하는 여성들이 줄을 잇고 있다.
약 7년여 만에 사건의 진상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하고 고통받았을지 공감하듯 폐쇄적인 조직 관계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그러나 정작 이번 사건의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이들은 공감은커녕 뭐가 이토록 국민들을 공분케 하는지 영 모르는 눈치다.
성추행 은폐의 주동자로 지목받은 모 국회의원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 안 난다’고 모르쇠로 일관하더니 수세에 몰리자, 없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건지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 한다. 며칠 만에 태도를 바꿔 한다는 말은 ‘해당 여검사가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 넘어갔다’는 것. 억울하다는 듯, 누가 은폐한 것이냐고 되려 묻는 우스운 처세는 할 말을 잃게 한다.
당사자가 덮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사건 책임자의 적반하장 태도는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빙상연맹의 행정 착오로 4년 동안 올림픽을 준비해온 한 선수의 꿈을 한순간에 물거품을 만들어 버릴 뻔 할 때도 협회는 '어쩔 수 없다'는 무책임한 한 마디를 내뱉고는 책임을 회피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되풀이되는 얼토당토 않는 답변.
앞으로도 누군가의 비리가 밝혀지고 성접대 의혹이 불거지고 뒤를 봐줬다는 부당 수사에 대한 논란이 대두돼도 또 다시 ‘어쩔 수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올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에 이토록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혀서는 아니다. 처음부터 믿은 적은 없었으니깐 말이다. 실날같은 그들의 양심에 호소해서일까. 것도 역시 아니다. 그들이 순순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과를 할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책임에 대한 이유랍시고 공공연하게 되풀이하는‘어쩔 수 없었다’ 는 핑계가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전가하기 좋은 구실로 쓰이고, 사회의 이면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사용되는 까닭은 아닐까. 같은 말, 다른 의미.
강자의 ‘어쩔 수 없이’저지른 횡포에 약자가 ‘어쩔 수 없이’참아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도리'앞에,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배포와 용기를 가져야하는지,불이익이라는 고통 앞에 얼마만큼 오래 참아야하는지 그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주중이건 주말이건 밤낮없이 요구하는 업무 지시와 강요하는 회식 자리, 참을 수 없는 상사의 성희롱 발언, 무례한 스킨십에 종일을 고민하고 몇 년을 고민해도 ‘어쩔 수 없이’ 참았던 이들. '그때' 왜 말하지 못했냐고 채근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이유를 묻는게 먼저일 것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명예회손이라고 거들먹 거리며 ‘사건을 덮은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몰아세우는 그들을 향해 말한다.
이제라도 ‘어쩔 수 없이’ 침묵의 카르텔을 깨겠다고.
오유정 키즈맘 기자 imou@kizm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