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치지도 말고 칭찬하지도 말라고?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엄마들은 혼란스럽다. 어떤 육아서는 야단치지 말고 칭찬하라고 하고 또 다른 책을 보면 엄하게 키워야 밖에 나가서 사랑받는 아이가 된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마음을 열고 엄마 아빠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친구 같은 엄마’, ‘친구 같은 아빠’가 그 답이다. 하지만 단지 같이 놀아 준다거나 편안한 것만이 아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아이가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도움을 주고, 공동의 과제도 함께하는, 그렇지만 결코 조종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존재 말이다.
아들러 육아 열풍을 몰고온 일본의 카운슬러 기시미 이치로 씨는 이러한 관계는 단지 아이의 원망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뿐 아니라 ‘아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이의 마음이 닫히면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열려야 도움도 받아들이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닌 존중이 밑바탕이 된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대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야단치는 것은 물론이고 칭찬하는 것도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아이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서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른 채 야단치고, 생각하는 의자에 앉혀 놓는다. 하지만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부모는 임기응변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또한 단순히 완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아이의 행동은 반복된다. 그렇지만 아이가 하는 행동의 목적을 알면 대처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아이가 문제 행동을 하는 것은 부모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어떤 아이든지 착하게 행동해서 부모에게 칭찬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이가 적절한 행동을 할 때, 부모는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친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든 부모가 자신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 문제 행동을 시작한다.
-아이를 야단치지 말자:아이는 야단쳐도 변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신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 문제 행동의 목적이라면 야단치는 것이야 말로 아이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에게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심하게 야단쳐도 아이는 문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야단치기 때문에 문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아이가 어차피 문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거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야단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야단맞으며 자란 아이는 야단맞을까 봐 무서워서 소극적으로 변하며,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만 생각하게 된다. 그릇이 작은 아이가 되는 것이다.
- 아이를 칭찬하지 말자: 수직 관계가 전제되는 ‘평가하는 말’, 칭찬
아이뿐 아니라 누구도 자신을 야단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야단치면 그 사람과 거리가 생긴다. 아들러는 분노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감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거리가 멀어지면 아이를 지원해 줄 수 없다.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를 야단쳐서 관계가 멀어진 다음에 아이를 지원해 주려고 한다. 하지만 관계가 멀어진 다음엔 아이가 귀담아 듣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칭찬하며 띄워 줘야 하는 걸까? 아들러 육아론에서는 그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는 칭찬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스스로 판단하여 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대했던 대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과제에 도전하지 않게 된다. 또한 칭찬은 야단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직 관계가 전제되는 ‘평가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들러는 어른과 아이는 같지 않지만 인간으로서는 대등하며, 아이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대하면 야단치지 않아도 되고 칭찬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 아이에게 용기를 주자: ‘자기 수용’이 필요한 아이와 부모
칭찬하면 아이의 기를 살려 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칭찬만 바라는, 칭찬에 지배받는 아이가 될 뿐 아니라 칭찬받을 수 없을 땐 행동하지 않거나 포기해 버린다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아이를 야단치지도 칭찬하지도 말고 아이에게 ‘용기를 주라’고 권한다. 여기서 용기를 준다는 건 아이가 자신의 인생 과제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아들러는 ‘보통으로 사는 용기’라는 말을 했다. 이것은 평범해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뛰어날 필요도 없고 나빠질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기 수용’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이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필요하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부모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녀상에서 아이의 단점을 깎는 마이너스적인 시선이 아닌 제로 상태에서 아이의 장점을 더하는 덧셈 육아를 한다면 아이는 용기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아이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라, 참 시크하고 멋져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부모들은 시크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육아의 목표는 아이의 자립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아이는 언젠가는 사회 속에 홀로 서야 한다. 언제까지나 품 안에 둘 수는 없다. 이렇게 저렇게 조종하는 대로 말 잘 들으면 그 당시에는 좋을지 몰라도 자기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겁쟁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자립하지 못하고 늙은 부모에게 기대려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야 말로 무서운 일이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 근처 소각장에 한 아이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고학년이면 기어올라왔을수도 있지만 나중에 확인해본 결과 그 아이는 겨우 1학년이었다. 그런데 소각장에 아이가 있는 것을 몰랐던 교직원이 불을 붙였고 결국 그 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집집마다 돌렸다. 기시미 이치로 씨는 아이가 다니는 학원에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저희 아이가 오늘 왔나요?"
"네 왔어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
많은 부모들은 그날 아이가 숙제를 안했건 양치질을 안했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 中>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0으로 치면 그 외의 일들은 뭐든지 플러스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아이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해주기도 쉽다. 이같은 덧셈 방식으로 아이들을 본다면 더이상 육아가 스트레스가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키즈맘 이미나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