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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진의 육아사생활] 어느 맘충(?)의 독백 '아니, 내가 벌레라니'

입력 2016-01-20 09:52:00 수정 2016-01-21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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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으면서 여자는 잠재적인 사회민폐자가 되어야한다. 다시 말해 언제든 남들이 아니꼽게 볼 수 있는 눈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

아이가 없을 땐 흔하게 먹던 커피숍의 커피 한 잔이 아기엄마가 되면 너무 마시기가 힘들다. 아이가 갑자기 울면 왜 이런 곳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씨끄럽게 하는지 이해가 안간단 표정으로 쳐다보기 전에 황급히 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모유수유 기간에는 아이가 갑자기 배가 고파서 칭얼대기 시작하면 수유실을 찾아 사방팔방으로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까페는 본 적이 없다. 그럴 때 젖병을 탁 꺼내들고 여유있게 분유를 먹이는 엄마들이 부러웠던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수유가리개를 사서 좀 가리고 수유를 해볼까도 했지만 인터넷상에는 내가 커피를 마시는 공간에서 누군가 젖을 먹이는 행위를 하는 것이 역겹다는 글이 종종 올라오는 걸 본터라 선뜻 행해지지가 않았다. 결국 뿅갹이의 모유수유 기간동안 나는 주로 수유실이 완비되어있는 대형몰이나 아울렛 혹은 백화점 같은 곳으로만 외출을 해야했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뒷자석에서 쪼그려 수유를 하곤 했다.



기저귀의 경우는 다를까 싶겠지만 이건도 못지 않게 난감하다. 뿅갹이는 모유를 먹어서 인지 하루에도 여러번 묽은 똥을 쌌었다. 외출할 때는 항상 여벌옷과 다량의 기저귀를 지참해서 나갔었다. 애가 갑자기 찡찡대서 살펴보면 옷에 노랑게 똥물이 들어있는 경우가 잦았다. 이럴 때 엄마는 특수요원이 된 것처럼 민첩하게 행동해야한다. 기저귀갈이대가 있는 화장실을 재빨리 찾아서 옷과 기저귀를 벗기고 엉덩이를 닦고 다시 새 기저귀와 옷을 장착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엉덩이를 닦는데에 있다. 수유실이라면 아기들 엉덩이를 씻기기 위한 세면대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눈치 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수유실이란 건 사실 선택받은 몇군데에만 존재하는 성스러운 곳이고 아이는 똥을 하루종일 싸댄다. 물티슈로는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해서 세면대에서 씻겨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인터넷에서 보았던 자신이 손 씻는 곳에서 아기 똥을 닦이는 게 너무 이기적이고 더럽다던 글이 또 뇌리를 스쳤다. 나는 아이를 낳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잠재적 민폐덩어리가 되고 만걸까. 계속 애를 더 낳으라고 권장하는 국가마저 원망스럽다. 왜 이렇게 행동 하나하나 눈치를 봐야만 하게 되었을까.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다. 생각으로만 머물던 수준의 것이 입으로 뱉어지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실체를 가지고 사고를 지배하고 기정사실화 되기에 이른다. ‘ㅇㅇ충’이란 표현은 일부 인터넷상의 기괴한 게시물을 올려대거나 사회악 수준의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가르켜 붙이기 시작한 표현이다. 오죽하면 인간이 아닌 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그것이 이제는 ‘엄마’들에게까지 붙어 ‘맘충’이 되고만 것이다.

한때 ‘엽기’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원래 ‘엽기’란 ‘엽기적인 살인사건’ 정도에나 붙는 수준의 말이었지만 그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조금 독특한 여자친구를 ‘엽기적인 그녀’라고 부르는 지경에 이렀다. 벌레란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을 벌레라고 낮춰부르는 것이 만연해져 이제는 일반인들까지도 언제든 벌레로 불릴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맘충’이란 표현을 가게 테이블 위에 아이 똥기저귀를 두고 가거나 뛰어다니는 애를 저지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일부 몰상식한 엄마들에게만 붙이는 호칭인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원래 젊을 때도 매너가 없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매너없는 노인네가 될 것이다. 일부 그런 사람들로 인해 ‘맘충’이라는 단어로 아기엄마 자체를 프레임화해서 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결국 사회의 후대를 양성해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아이를 낳고 엄마의 입장에 서야 가능한 것인데 다같이 오늘만 살고 말 것이 아닌 입장에서야 그 그룹 전체를 벌레화해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분노가 만연한 사회다. 모두가 인상을 찡그리고 사는 세상같이 느껴진다. 조금만 늦게가도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울려대고 지하철에서 비키라고 소리지르는 노약자들이 날로 늘어난다. 일자리는 얻기 힘들고 어렵게 생긴 일자리의 월급은 쥐똥만하며 그나마도 언제 짤릴지 알 수 없다. 집값은 하늘높은 줄 치솟아 평생을 모아도 쫓겨나지 않고 내 몸 뉘일 집구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회가 이렇게 살기 힘들어지다 보니 쌓이는 분노의 양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그 분노를 쉽게 배출할 타인이 필요해졌다. 결국 그들이 찾아낸 만만한 상대는 젊은 여자였다. 신체적으로도 유약해보이고 사회적으로도 남자보다 대접이 약한 여자. 그런 여자들이 세상이 좋아져서 자기 목소리 내고 다니고 명품백들고 브랜드 커피를 마신다. 아니꼬와 죽겠다. 개인적으로는 그게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는 그런 여자들을 비꼬고 조롱하는 게시물들이 판치게 되었고 그 현상 또한 ‘여성혐오’라는 당당한 단어를 획득하게 되었다. 익명에 숨어서 키보드를 두드리면 되는 분노표출은 가해자에게는 이렇게 편하고 쉬울 수가 없다. 마음껏 욕을 해도 상대는 내가 누군지조차 모른다니. 그러는 너는 욕할 자격은 있냐는 평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욕은 날개를 단다.

분노는 계속 자라나서 이제 그 대상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젊은 여자는 곧 젊은 엄마가 된다. 이제는 그 엄마들에게 ‘맘충’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마음껏 욕하고 싶어진 것이다. 장막 뒤의 가해자는 즐겁고 피해의 규모는 날로 커진다.

아이는 사회가 함께 키우는 것이다. 낯선 아이와 눈을 마주쳐도 다정하게 웃어줄 때 아이는 세상이 따뜻한 곳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이가 먹다 흘려도 원래 애들은 그런 것이라고 이해해주고 길을 잃으면 함께 부모를 찾아주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 아이들이 자라나서 사회의 주축이 되고 기성세대가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벌레소리를 듣는 엄마가 눈치보고 주눅이 들어서 키운 아이들이 이 사회의 지배자가 되는 날을 상상해보라. 그 때 노약자가 되어버린 지금의 키보드 워리어들에게 어떤 시선을 보낼지.

우리는 우리가 내뱉는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신용이고 그것이 결국 사회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함부로 누군가를 벌레라 칭해서는 안될 것이고 나의 고요한 커피타임을 조금 방해한다고 해서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방에만 있기 싫어서 밖에 나와 커피를 한 잔 한 것처럼 집에서 애랑 둘 만 있다보니 미칠 것같아서 잠깐 나온 애기 엄마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다. ‘관용’의 미덕이 절실한 2016년의 대한민국이다.

심효진 <육아 칼럼리스트>
남편과 아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살림과 꽃꽂이를 좋아하고 기록을 할 때 정신이 가지런해진다고 믿는 5년차 주부. 글쓰는게 제일 꾸준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 틈틈이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있다.
입력 2016-01-20 09:52:00 수정 2016-01-21 10:15:00

#산업 , #생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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