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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진의 육아사생활] 손주의 의미

입력 2016-03-04 20:14:01 수정 2016-03-04 2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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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뿅갹이와 둘이 대구에 다녀왔다. 대구에는 시부모님이 살고 계시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대구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는 서울 외에 가장 익숙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4살 아이와 둘이 KTX를 타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겨울패딩과 아이를 끌어안고 난방을 쐬고 있자니 아이도 나도 땀범벅이었다. 언제 도착 하냐고 아이가 백한 번 째 물었을 때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손주를 마중 나온 할머니가 함박웃음을 띄면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오길 잘했다 싶었다.

시부모님은 결혼하자마자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셨다. 남편은 출산과 동시에 외할머니 손에서 2년 반 동안 컸다. 시어머니가 자식이 도저히 눈에 밟혀 그 때 일본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본인이 낳은 자식임에도 어린 시절 끼고 키우지 못한 탓일까 손주의 커가는 모습에 대해서 유독 애틋하게 여기신다. 때로는 엄하게 구는 엄마와 달리 한없이 수용적인 할머니 덕에 뿅갹이는 대구에만 가면 할머니 품에 착 안겨서 천하를 얻은 것처럼 호령한다.

“뿅갹아, 이제 양치하자.”

“놀다가 좀 이따 하자아아!”라며 전에 없는 호통조로 나에게 말한다. 나랑 둘이 있을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손주가 태어나고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시아버지다. 남편과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젊은 시절의 아버님은 늘 새벽에 귀가하고 집에서는 말 한마디, 웃음소리 한 번을 내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님이 뿅갹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늘 입을 반 쯤 벌린 채 ‘허허허허’하는 웃음을 달고 사신다. 주름마저 웃는 방향으로 새롭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책을 잡고 논문을 써내려가던 손으로 손주의 장난감 건전지를 갈겠다며 드라이버를 이리저리 돌리고 계신다. 손주와 함께 어항 속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고 화초에 물을 주면서 취미를 공유한다.

젊은 시절의 아버님은 사회를 확 뒤집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방에는 교과서가 아닌 전단지가 들어 있었고 몸집이 두 배는 더 큰 중학교 형아들 학교 앞에 가서 그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생활고가 너무 심한 나머지 차라리 동자승이 되겠다며 절에 가있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배고팠던 시절 많은 아이들의 생활이 그랬을 지라도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행복보다는 주어진 무게가 훨씬 컸을 그 작은 아이의 이야기가 몹시 안쓰러웠다.

어머님의 제보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아버님도 상당히 가정적이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빠였다고 한다. 보육원에서 아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등에 업힌 아이가 오줌을 싸서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도 화 한 번을 낸 적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직면한 사회 문제를 마주하면서부터 아버님은 집안 문제보다는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술자리도 잦아지고 집에 있는 시간은 줄어갔으며 그만큼 가족과의 심리적인 거리도 멀어져 갔다.

남편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치른 첫 시험에서 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아버님은 크게 화를 내셨고 그 때를 계기로 부자 간에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해 둘은 한동안 서로 대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두 남자 간에는 마음을 터놓은 깊은 교류 없는 형식적인 관계가 이어졌다. 아버지에게 전화하면 첫 마디가 “여보세요”가 아닌 “왜?” 였으며 남편이 군대에 가있을 때 아버님은 위문편지를 A4용지에 출력해 하단에 사인해서 보내셨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갹갹아, 공문 왔다”며 놀렸다니 이 부자간이 얼마나 용건만 간단한 관계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 아버지가 며느리 될 사람이 인사 온다고 하자 이틀 동안 생전 안하던 집 청소를 하시고 목욕탕까지 다녀오셨다. 나를 처음 만난 날 본인이 어떻게 생전 처음 전등갓을 떼어내서 닦으셨는지 설명해주셨다. 나는 항상 따뜻한 아버님의 모습만 보아 왔어서 예전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나와 시아버지는 죽이 잘 맞아서 한 번 통화를 하면 40분가량 열띤 토론을 하고는 한다. 서울로 출장오신 아버님과 서울역에서 만나 두 시간동안 커피숍에서 수다를 떤 적도 있다.

평소엔 과묵하다가도 술 한 잔 걸치면 으레 진심을 말하곤 하는 여느 어르신들처럼 언젠가 아버님은 늦은 밤 전화를 거셨다.

“뿅뿅아, 나는 젊은 시절 야망으로 가득 했어.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확 바꾸고 싶었지. 하지만 사회의 벽은 너무도 컸다. 그게 너무 답답하고 싫었어. 그런데 이제 네가 우리 가족이 되고 뿅갹이가 태어나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이제는 연구를 하고 뿅갹이가 커가는 것을 보는 게 제일 즐겁다. 내 삶에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하는 게 요즘인 것 같구나. 정말 고맙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서 내가 뭐하자고 이런 고생을 사서하나 싶은 순간이 많았는데 그 노력이 다 헛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번 칼럼의 주제로 아버님을 써도 되는지 여쭈어보면서 어찌 보면 굉장히 직설적인 질문을 했다.

“아버님, 손주를 커가는 것을 보면서 기쁘긴 하지만 이제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으세요?”

이 당돌한 질문에 아버님은 잠시 생각을 하시는 듯하더니 아버님 품에서 낮잠에 든 뿅갹이의 등을 토닥이며 입을 여셨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순응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있지만 마음 한편에 사회가 더 나아지길 바라는 게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뿅갹이가 태어나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이 생긴 것 같지. 우리 세대에 못 이룬 것을 이 세대에서는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거야.”

언젠가 젊은 시절 아버님의 사진을 보고 그 똘망똘망한 눈빛에 나의 속마음이라도 들킨 것처럼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앉았던 적이 있다.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손주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지만 그 정신만은 죽지 않았다. 잠시 간의 정적을 깨고 아버님은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젊었을 때 밖으로 도느라 갹갹이가 크는 걸 제대로 못 지켜봤어. 그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크다. 뿅갹이를 보면서 그 때가 자꾸 생각나 더 잘해주려고 한다. 과거의 나와 갹갹이의 관계에 대한 보상 같은 느낌도 드는구나.”

남편 역시 예전에 아빠는 엄하고 이해가 안가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누군가의 아빠 입장이 되어 보니 그 때의 아빠가 얼마나 불안했으며 큰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졌었는지 이해가 간다는 말을 했었다. 부자 간의 오해의 골은 뿅갹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어렵게 이룬 3대의 행복이 언제까지고 이어졌으면 좋겠다.


심효진 육아칼럼니스트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전)넥슨모바일 마케팅팀 근무, (전)EMSM 카피라이터, (현)더나은심리계발센터 교육팀장, (현)M1 정진학원 교육컨설턴트
입력 2016-03-04 20:14:01 수정 2016-03-04 20:14:01

#산업 , #생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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